2017년 3월 2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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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친일행각에 사형선고까지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경제인’들] 중앙일보 홍진기 편

박지영 기자 | pjy@newsprime.co.kr | 2009.12.10 13:09:42 

[프라임경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8년 만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행위자 4389명의 ‘행적’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후손들 반발이 거센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유족들은 <친일인명사전>을 입수해 꼼꼼히 살펴본 뒤 민족연구소를 상대로 출판물 명예훼손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친일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모른 체 시치미 떼는 몰염치 후손도 있다. 대부분 경제인 친일행위자 유족들이 그렇다. 친일파 명단에 오른 경제인은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를 비롯해 △현대그룹 현준호(현정은 회장 조부)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장인)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등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경제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차례대로 알아봤다. 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재벌’ 시리즈 제3탄 전 중앙일보 회장 홍진기의 친일사례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삼성그룹 역시 친일파 후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가 ‘안방마님’ 홍라희 여사의 집안 내력 탓이다. 홍 여사 부친인 홍진기(일본식 이름: 德山進一)는 일제강점기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홍진기는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총독부 고등문관을 지냈다.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탓에 그의 후손들은 “일제시대 판사직을 맡은 것만으로 친일파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은 다르다. 민족연구소 측은 “일제 때 사법 관리로 임명받기 위해 노력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된다”며 “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홍진기의 일생을 되짚어봤다.
◆홍씨 일가 뼛속까지 ‘친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홍진기> 
유민 홍진기는 1917년 3월13일 경기도 고양에서 홍성우 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다. 결혼할 때 처가에서 그의 집안을 보고 탐탁지 않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집안환경은 홍진기를 더욱 더 채찍질 했다. ‘성공’에 대한 남다른 욕심이 있던 홍진기는 학업에 충실했다. 1934년 3월 경성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 문과를 수료한 후 일제시대 말인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홍진기는 1942년 3월 경성지방법원 사법관시보를 시작으로 법조계에 첫발을 딛었다. 이후 홍진기는 일제강점기 때 판사를 지내다 해방 뒤 대검 검사로 활동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처형
홍진기 일생 중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이승만 독재정부 때다. 1954년 법무부 차관을 거쳐 이듬해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국가보안법 파동’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키도 했다.
3·15 부정선거는 그에게 대통령 신임을 얻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줬다. 홍진기는 부정선거를 수습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장관에 선임됐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부정선거에 불만을 품기만 해도 ‘빨갱이’로 몰아 있지도 않은 죄를 물었으며, 4·19 혁명 땐 내무장관으로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당시 수도권에서만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홍진기는 항일운동가 죽산 조봉암 선생을 처형하는 데 두 팔을 걷고 도왔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죽산 조봉암은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작된 간첩혐의 유죄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 바로 다음 날이었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치하 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으로 7년 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헌법제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대학시절 죽산 조봉암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물론 죽산 조봉암 선생 처형은 그에게 위협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이중간첩 혐의를 조작해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죽산의 처형을 행동에 옮긴 주역은 바로 홍진기 당시 법무장관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홍진기가 처형 명령에 서명한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군사법정서 사형선고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홍진기 또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60년 5월,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군사법정은 홍진기에게 1심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살아날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던 홍진기에게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그에게 ‘동아줄’이 돼준 사람은 다름 아닌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였다.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고 이병철 회장이 홍진기 타계를 기리며 쓴 조사에도 잘 나와 있다.
당시 이 창업주는 “당신(홍진기)은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 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론 나의 사돈이었다”며 슬픔을 감추지 않았다.
창업주의 도움을 받은 홍진기는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19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재판기간 중 실제 복역한 건 고작 9개월에 불과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홍진기는 이 창업주의 후원을 받아 1965년 동양방송 사장을 시작으로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앙일보 종신사장으로 있었다.
홍진기의 운은 사망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의 호를 딴 학교가 생긴 것이다. 서울대는 2003년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를 홍진기 호를 따 ‘유민홀’이라 불렀다.
이를 두고 항간엔 그의 공을 기리고 본받으라는 의미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이윤 따로 있다. 그 건물을 기부한 사람이 홍진기의 아들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홍진기는 김윤남과의 사이에서 모두 4남2녀를 두었다.
자식으로는 △장녀 홍라희 여사(이건희 전 삼성 회장 아내,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비롯해 △장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전 주미 대사) △차남 홍석조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삼남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사남 홍석규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회장) △차녀 홍라영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 등이 있다.

 

홍석현의 아버지 홍진기는 4.19 발포 총책임자로 사형 선고 받음

작성자 자유의방패 작성일17-01-02 21:08 조회603회 댓글0건

홍석현의 아버지 홍진기는4.19 발포 총책임자로사형 선고 받음


-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

- 그의 아버지 홍진기

- 4.19 당시 홍진기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발포 총책임자이며, 이후 재판과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은 재벌-한나라당-조중동-검찰을 연결해서 말하고, 여기에 목사들하고 예비역 대령연합회 같은 애들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좀 광범위합니다만 정확히 실체가 뭘까요.

저는 이거 핵심은 이병철하고 홍진기라고 생각합니다.

홍진기는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입니다.  일제시대에 판사 였으면, 친일파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홍진기는 해방후 이승만에게 달라붙어 살아남았는 데,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홍진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있으며 이승만에게 계엄령을 건의했고, 4.19가 일어나 경찰이 시민에게 발포했을 때, 경찰을 지시하는 내무부 장관이었습니다.

4.19로 세상이 뒤집어진 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는 데, 손을 써서 빼낸 게 삼성 이병철이었습니다.

이병철이 홍진기를 빼낸 후, 돈을 줘서 만든 게 중앙일보입니다. 현재 중앙일보는 홍씨네 거로 알려져 있지만, 기실 아직도 삼성 이씨네가 주인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의 지분을 홍씨 명의로 위장해놓고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라고 폭로했었죠.

재밌는 게, 홍진기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폐간시켜 버린 게 경향신문입니다.

경향신문은 나중에 부활했고, 홍진기는 중앙일보를 차렸으니, 두 신문은 악연이 깊습니다.

홍진기는 단순히 이병철의 얼굴마담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이었는 데, 자신의 자식들을 여기저기 시집보내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홍진기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 핵심인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와 사돈을 맺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자 안기부장 노신영 네에 다른 딸을 시집보냅니다.

이렇게해서 일제시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현재도 로열 패밀리로 살아가는 홍씨일가가 완성되었습니다.

정 리하자면, 홍진기의 맏딸 홍라희는 삼성 이건희의 아내입니다. 홍진기의 아들 홍석현은 중앙일보 회장입니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집에 장가갔습니다. 홍진기의 딸 홍라영은 5공 안기부장 노신영집에 시집갔습니다. 홍진기의 아들 홍석조는 검찰에서 고검장까지 지냅니다.

홍진기가 사돈 맺은 사람들을 좀 더 살펴보면, 신직수는 박정희가 5사단장 할 때 법무참모 였습니다. 대위였습니다. 그 연줄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이 젊은 애를 바로 검찰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36살. 대한민국 최고로 어린 검찰총장이고 앞으로도 기록이 깨지지 못할 겁니다. 신직수가 들어오자 검찰 간부들은 대거 사표내고 나갔고, 신직수가 검찰을 장악합니다.

신직수는 8년간 검찰총장을 지내고, 그 다음 법무부 장관 3년, 그리고 나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냅니다. 박정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데, 1,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낸 것도 신직수입니다. 74년 유신으로 정권에 대해 여론이 안좋자, 가짜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서 싹 쓸어버린 거죠. 민간인을 잡아다 간첩으로 몰아 죽여서 분위기를 평정하는...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총애를 받아 안기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입니다. 노신영은 안기부장으로 있으면서, 검찰에서 똑똑한 애를 뽑아 안기부로 보내라고 시킵니다. 그때 뽑혀온 게 정형근이었고, 노신영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정형근은 공안검사로 생활하다가 나중에 한나라당에 공천받아 국회의원으로 진출합니다.  한나라당에 검찰 출신 (특히 공안검사 출신들)이 우글거리는 데, 그 축이 됩니다.

곁다리 얘기지만, 한나라당에는 검찰 출신 의원들이 우글거리는 데, 타당에는 거의 없습니다. 한나라당에 16명, 17명씩 있는 데, 민주당에는 0명이거나 1명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한나라당이 장기집권했으니 그리 갔다지만, 지난 10년 민주당이 정권잡아도 검찰은 한나라당으로 공천받으러 갔습니다. 검찰인맥이 완전히 한나라당과 얽혀 돌아가는 걸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최근(2008)에, 이건희-홍라희 부부는 딸(이서현)을 동아일보 김회장네에 시집보냅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사돈이 되는 순간입니다.

한편 홍진기 아들 중에 똑똑하다는 홍석조는 검사가 되었는 데, 검찰내부에 삼성 돈을 뿌리고 다니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검찰이 삼성에 장악당했다느니, 삼성장학생이라느니 라는 말이 나오는 게 홍석조가 내부에서부터 포섭을 해온 결과이죠. 홍석조는 고검장까지 올라갔다가 삼성 도청테이프 사건이 터져서 물러났습니다.

그 도청테이프에서, 중앙일보 홍회장이 삼성 이학수 부회장을 만나 이건희 회장에게 받은 지시를 논의합니다. 누구에게 돈을 먹일까. 거기서 이번 명절에 홍석조더러 검찰안에 똑똑한 쥬니어들에게 돈 좀 주라고 하죠 라고 말하는 게 나오거든요. 이게 9시 뉴스에 방송타면서 홍석조는 물러나게 됩니다.

홍석조는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네~ 결백할 겁니다. 그래서 삼성장학생 임채진이 검찰총장이 되었죠.  현 검찰총장 임채진이 삼성장학생인 것은 소문으로 떠돌다가 김용철변호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하면서 알려졌고, 인사청문회에서 노희찬 의원이 삼성 베네스토 골프장에서 삼성 사장들하고 골프치면서 로비받은 적 있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납니다 라고 임채진이 답변하는 게 TV 생중계 되면서.. 확정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삼성 그룹 법무실에서는 밖에서 검찰에 돈을 먹이고, 안에서는 홍석조가 먹이고.. 안밖에서 먹이면서 검찰을 장악한 것이죠. 검찰이 재벌들 수사할 때 봐주는 경향이 예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현재는 완전히 삼성 손아귀에 있습니다. 덕분에 검찰에 걸리면 타 재벌들이 삼성에 부탁을 하는 상황입니다.

대상그룹이 2008년 검찰수사에 걸렸을 때, 삼성에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처리가 안된 모양입니다. 대상그룹 임세령이 삼성 이재용과 이혼하는 사유중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했던 내용중에 신세계 그룹(이건희 누나)쪽 에서 검찰에 잡혀들어갔는 데 이건희가 조카를 봐주기 위해 손을 써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희가 친가쪽에는 후한 데, 며느리 쪽에는 냉정했던 모양.

이렇게 해서 조중동-삼성-한나라당-검찰 이 연결됩니다. 결국 우리나라 기득권층 이라는 거대 카르텔은 이병철-홍진기 이 두 집안이 대한민국 전체에 영향력을 확장해 장악해가는 걸 포장해놓은 것입니다.

명 박이나 박근혜는..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년 지나면 갈아치울 얼굴마담이고, 실체는 이병철-홍진기 이 두 집안이 대한민국을 통채로 집어삼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 언론, 한나라당에 계속 돈을 먹여 타락시키고 자기 말을 듣도록 길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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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대단한 집안입니다.


2차 출처 : 오늘의 유머 시사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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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의 ‘선의’는 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

김하영 저널리스트 media@mediatoday.co.kr 2017년 03월 20일 월요일

0.

홍석현 회장이 실시간 검색어 1위다. 중앙일보, JTBC 회장을 사퇴하고 ‘국가를 위한’(?) 활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이를 두고 대선에 직접 나오느냐, ‘킹 메이커’가 되기 위해 유력 대선주자 캠프에 뛰어 드느냐를 두고 말들이 많다. 이미 홍석현 회장이 중앙일보를 통해 ‘리셋 코리아’ 캠페인을 할 때도 “마치 대선 출마 하려는 사람 같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이번에는 회장직까지 내려놓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이렇게 말하면 ‘안희정스러운’ 건가?) “내가 나라를 망쳐 보겠소”라며 정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의 ‘선의’를 들어보기 이전에, 그의 ‘존재’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에서 ‘홍석현’ 이름 석자가 갖는 존재적 의미를 좀 살펴보겠다.

*모든 인물의 직함은 생략한다. 직함 붙일 때 항상 경력 중 최고 높은 직책을 부러 찾아 붙이고는 하는데, 난 이게 권위주의의 산물이라 본다.

1.

홍석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촛불 정국이 계기였다. ‘박근혜 하야’ 얘기가 나오고, 촛불 시위가 “미완의 혁명인 제2의 4·19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들이 자주 나왔다.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하야와 4·19 혁명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4·19혁명이 ‘미완’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어떤 이는 ‘내각제’가 문제라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내가 보기에 4·19혁명이 흐지부지 된 가장 큰 원인은 ‘인적청산’ 부실이다. 장면 내각이 들어섰지만 사실 ‘그 밥의 그 나물’이었다.(이 대목은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4·19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처벌 대상 책임자 중 한 명이 홍석현의 아버지인 홍진기이다.

2.

홍진기는 1917년 서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공부를 잘했던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1942년 판사 시보로 시작해 1944년 9월 전주지법 판사로 부임했다. 일제 판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 처벌을 피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지만, 그 당시에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승승장구했다. 미군정 법제부에 들어가 법률전문가로 활약했고, 이승만 정권 출범 후에는 대검찰청 검사가 되고, 법무부 차관에 이어 장관까지 고속 승진했다. 그 시절 보안법을 엮어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 폐간을 주도했고,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엮어 기소했고, 사형 집행 명령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1960년 4·19가 터졌다. 3·15 부정선거로 시국이 흉흉해지자 이승만은 홍진기를 내무장관에 앉혔다. 경무대(현 청와대)로 시위대가 몰려오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했고, 초등학생 포함 100명 이상이 숨졌다. 홍진기는 법정에서 “최선을 다해서 막도록 하라고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어쨌거나 홍진기는 당시 경찰 총 책임자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징역 9개월로 감형됐다. 그런데 이듬해인 1961년 5·16이 터졌다. 민심을 얻어야 할 군사정권은 장면 정권의 미지근한 처벌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군사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은 홍진기는 ‘사형’을 선고 받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됐는데, 그 때 ‘은인’을 만난다. 홍진기와 감방에 같이 있던 인물 중에 신현확이라고 있었다. 경성제국대 후배인가 그런데, 신현확은 일제 강점기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산업 관련 관료를 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이승만 정권에서 나이 서른아홉에 부흥부 장관(지금의 산자부 정도)을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홍진기와 함께 수감됐다.

3.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이병철이다. 이병철이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만들 때 적극 도왔던 이가 신현확이다. 당시 우리 경제는 미국 원조를 바탕으로 먹고 사는 구조였다. 미국은 원당, 원면 등 원자재 위주로 무상 원조를 했는데, 원조 물자를 분배하는 관료들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병철은 신현확에게 신세를 많이 진 셈이었다.

이병철이 박정희 정권에 로비해 신현확 구명 운동을 펴는데, 그 때 신현확이 ‘한 명 더’ 부탁한다. 홍진기를 지목하며 “살려서 곁에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병철은 홍진기를 만나봤다. 홍진기에게서 “박식하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내다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이병철은 홍진기의 옥바라지를 하고 구명운동을 폈다. 아마 사법계에 두터운 홍진기의 인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1963년 홍진기는 특사로 풀려났다.

▲ 홍진기 전 중앙일보사 회장
▲ 홍진기 전 중앙일보사 회장
그 당시 ‘삼분파동’(설탕 밀가루 등 폭리를 취하고 정치자금 제공) 등을 겪은 이병철은 독자적인 언론권력을 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964년 서울중앙라디오방송을, 1966년 중앙일보를, 1969년에 동양방송(TV)을 차리는데, 감옥에서 나온 홍진기에게 맡겼다. 그 사이 1967년에는 셋째 아들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켜 ‘사돈 관계’라는 혼맥 관계까지 구축했다.(홍진기는 전주에서 판사하던 시절 큰 딸을 얻고,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羅喜’라 이름을 지었다고)

4.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맡은 홍진기는 이병철의 ‘언론 파트’ 핵심이 돼 거의 한 몸이 됐지만, 사법 권력에 대한 야심을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정희 정권 시절 사법 권력의 핵심 인물 중 신직수라고 있다. 박정희가 5사단장 할 때 법무 참모를 하다가 5·16 이후에는 검찰 권력의 핵심이 됐다. 서른여섯에 검찰총장을 하고 1971년에는 법무장관을 하면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1973년부터는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등을 만든, 그러니까 ‘나쁜 놈’이라고 자신있게 말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홍진기는 장남 홍석현을 신직수의 딸 신연균과 결혼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다. 홍석현의 장인인 신직수가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김기춘을 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진기의 ‘혼맥 쌓기’는 전두환 정권 실세로 이어진다. 막내 딸 홍라영을 통해 5공 실세 노신영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

홍진기는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 회장직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언론계보다 사법계에서 ‘존경’ 받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대 법대에는 그의 호를 딴 ‘유민홀’이라는 공간이 있다.

5.

이 정도만 봐도 홍진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애비의 책임을 자식에게 물어서 될까.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홍진기와 이병철의 관계. 그러니까 중앙일보와 삼성의 관계는 대를 이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다.

이병철의 사업 스타일이 ‘동업’을 탄탄하게 가져간다는 것이라고 한다. LG, GS 가문과의 동업도 유명한 얘기이고, 이익이 되는 인물들과는 철저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동업을 유지했다고 한다.(어쩌면 '정권'도 동업자로 생각했을 수도) 이병철은 홍진기도 '동업자'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홍진기가 먼저 저 세상을 뜨자 그렇게 슬퍼했다고 한다.

홍진기는 자녀 교육 계획을 어떻게 세웠을까? 이병철에게서 받은 중앙일보도 물려줘야 하고, 자기의 뿌리인 사법 권력에도 계속 발을 담궈야 하지 않았을까.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이치열 기자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이치열 기자
큰 아들 홍석현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간다. 혹시 삼성전자에 보내려 했나? 아니면 법대 가기에는 성적이 모자랐나?(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가 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홍석현은 미국 유학 중 전공을 경제학으로 튼다. 그러다 1977~1983년 세계은행 조사역을 하고 귀국해 재무부장관 비서실, 대통령 비서실 등에서 근무하고 삼성코닝에서 부사장까지 한다. 그리고 1994년부터 중앙일보를 맡았다.

그 시절 안기부 도청팀이 여기저기 도청을 많이 하고 다닌 모양인데, 1997년 대선을 앞둔 어느 날, 이건희의 ‘그림자’인 이학수와 홍석현의 대화를 녹음했다. 검사들에게 ‘떡값’을 돌린 이야기, 정치자금 돌리는 이야기 등의 대화가 오가는데, 홍석현이 “15개는 괜찮은데 30개는 무겁더라고”라고 말한 대목이 유명하다. 직접 돈 심부름을 하고 다닌 것이다.

6.

X파일 사건은 2005년에 터졌다. 홍석현이 노무현 정권에서 주미대사를 하고, 유엔사무총장 출마 의사를 밝히는 등 잘 나가던 때였다. 당시 항간에는 노무현 정권이 차기 정권으로 ‘좌 근태-중 동영-우 석현’ 경쟁 구도를 그리고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홍석현은 ‘정치권력’ 획득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러다 X파일 사건 한 방에 와르르. 게다가 ‘배달사고’를 쳐 30억을 ‘인 마이 포켓’ 했다느니, 좀스러운 소문도 많이 돌아 위신이 한참 구겨졌다.

그 전에도 위신을 구긴 적이 있다. 유명한 일화가 1999년 “사장님 힘내세요” 사건이다.

사실 언론사를 하면 ‘면’은 서지만 큰 돈벌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인지 1983년 이병철은 홍진기에게 TV브라운관 납품을 맡겼다. 그 시절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 활황을 생각하면 얼마나 장사가 잘 됐겠나. 그게 ‘보광’이라는 회사다. 홍씨 가문도 일약 산업 재벌 반열에 올랐고, 휘닉스파크, 패밀리마트(지금의 편의점 CU) 등 내수 서비스, 유통업에도 공격적으로 진출한다. 중앙일보와 보광은 한 몸인 셈이다.

그런데 DJ가 대통령이 된 뒤, 보수언론들이 대거 세무조사를 당한다. 조선, 중앙도 날뛰었지만 중앙이 특히 그랬다. ‘보광’이라는 회사를 끼고 있어서 털릴 게 많았던 거다. 그 때 털어보니 탈세와 자금세탁에 쓰인 은행통장만 1000개가 넘고 목도장만 수백 개였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전해온다. 이 일로 홍석현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갈 때 중앙일보 기자들 40여 명이 도열해 “사장님 힘내세요” 빠이팅(!)을 외친 거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몄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결국은 홍석현 얼굴 먹칠 흑역사가 된다.

▲ 2008년 3월4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08년 3월4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병철은 정치권력보다 언론권력의 수명이 길다는 생각에 언론사를 차렸지만, 홍석현은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론권력 쥐었으니 이제는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아니면 국가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진심이었을지라도. 어쨌거나 좋게 말해도 언론 권력만으로는 자신의 이상 실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7.

뒤에 온 노무현 정권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주미대사까지 했겠지. 중앙일보의 논조도 노무현 정권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원래 중앙이 조선이나 동아에 비해 리버럴하기는 하다. 그러나 홍석현의 행보 덕에 중앙은 언론계에서 ‘기회주의적’이라고 여겨지고는 한다. 그래도 몇몇 꼴통 선배들 나간 뒤에는 그나마 ‘합리적’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정도로 봐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다 X파일로 무너진 위신을 살릴 기회가 왔으니, 이명박 정권이 선물해준 JTBC와 2013년 손석희 영입이다.

JTBC는 TV조선이나 채널A와 달리 드라마나 예능에 물량을 투입해 ‘고퀄’을 유지하며 차별화를 했고, 손석희 영입을 통해 보도 부문에서도 ‘꼴통끼’를 빼며 무너진 KBS와 MBC의 보도 경쟁력 대체자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영리했다.

홍석현은 1994년 중앙일보 맡을 때도 (미국 물을 먹어서인지) 가로짜기 판형, 섹션화, 전문기자 도입, 비교적 리버럴한 논조 등을 통해 중앙일보 성장의 큰 역할을 한 건 맞다. 운도 좋았다. 역설적이게도 삼성과의 관계라는 태생적 한계가 X파일 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리 됐다.

그러다 촛불 정국 방아쇠(최순실 태블릿 보도)까지 당겼으니 홍석현은 “손석희를 삼고초려해 모신 게 나야”라고 자랑하고 다니며, 못다 이룬 꿈을 다시 꾸는 것 아니겠나.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사진=JTBC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사진=JTBC
8.

그런데 난 홍석현의 야망이 불편하다.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선의(?), 비교적 합리적인 이념적 스탠스, 언론사 경영을 통해 보여준 시장(혹은 사회) 분석 및 예측 능력 등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는 한 때 언론계에서 ‘계몽군주’로 통했다. 동아일보가 무능력한 사주를 만나 몰락하는 가운데 중앙일보는 홍석현이 유능해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홍진기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전자공학도가 돼 엔지니어가 될 수도, 세계은행에 근무하며 개발도상국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관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혹은 삼성에게서) 중앙일보를 물려받는 순간, 그는 ‘홍진기의 아들’로 남은 것이다.

좋다. 아버지 시대의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가혹한가. 보광이라는 기업은 홍씨 일가가 쥐고 앉아 지배하고 있다. 검사하면서 삼성의 떡값 심부름을 하던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검찰총장 꿈은 접은 뒤 검사 일과는 상관도 없는 BGF리테일(편의점 CU) 회장 노릇을 하며 가업을 잇고 있다.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회사인가. 이게 온전히 그들 가문이 이룩한 업적인가. 무엇보다 홍석현은 아들 홍정도에게 중앙일보와 JTBC를 그대로 물려주고 있지 않은가.

9.

2017년.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계층 이동을 위한 사다리는 무너졌고, 금수저-흙수저 한탄이 봄날 황사 미세먼지처럼 나라에 뿌옇게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홍석현의 ‘선의’는 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 아들과 며느리, 형제, 자매와 조카들까지 일가 전체가 동원돼 잔뜩 쥐고 있는 재물과 권력을 놓지 않는다면 그의 선의는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쥐기 위해서는 지금 손에 쥔 것을 놓아야 한다. 홍석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재정립 없이 군중 앞에 서는 순간, 그는 ‘계몽군주’가 아니라 분수를 모르고 나라의 군주가 되고자 하는 ‘꼰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5733#csidx026d491a192fe9f9f15e595bed2ed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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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사보’ 역할에서 ‘홍석현의 왕국’으로

[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맨얼굴 ④ ] 중앙일보 (1)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media@mediatoday.co.kr
우리나라 족벌신문사와 사주들은 ‘권력 그 자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재벌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는 입맛에 따라 선별적으로 하거나, 회사와 사주들의 이익(私益)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처럼 공격의 대상으로 지목되면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오보로 판결이 나도 좀처럼 지면을 통해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특징을 3가지만 꼽으라면, 거짓말, 뻔뻔함, 그리고 집요함을 든다. 목표가 정해지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이 이들에게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엄청난 ‘방송 무기’까지 안겨주었다. 이제 신문과 방송 모두를 가진 족벌언론과 사주들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대법원에서 탈세 확정판결을 받아도 대통령이 사면해 준다.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끝나면 물러나지만, 족벌언론 사주들은 대물림으로 ‘족벌언론 왕국’을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혼맥으로 얽히고 설킨 지배세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족벌언론 사주들부터 살펴본다. 독자와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편집자 주>


44개 계열사 가진 대규모 기업집단

중앙일보는 우리나라 최대의 복합미디어그룹이다.  신문 구독(발행) 부수와 매출액(광고수입 포함)만 놓고 보면, 조선일보와 우열을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벌이고 있는 사업의 규모와 업태의 다양성 등을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사업영역이 단조로워(?) 보이는 조선일보는 비교조차 안된다.
중앙일보그룹은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중앙Sunday, 영어신문 ‘Korea JoongAng Daily’ 등 5개의 일간신문, 종합편성채널 JTBC, Q-TV, J골프, 카툰네트워크 등 4개의 방송채널, 3개의 인터넷사이트, 뉴스위크(Newsweek)와 포브스(Forbes)를 포함한 15개의 잡지까지 모두 27개의 매체를 발행, 혹은 소유·경영하고 있다.
게다가, 뮤지컬 제작사인 ‘설앤컴퍼니’와 드라마제작사인 ‘드라마하우스,’ 대형 복합상영관인 ‘메가박스’에 이르기까지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 및 영상 콘텐츠의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수직계열화했다.
그래서 중앙일보사가 스스로 ‘이런 미디어 포트폴리오를 갖춘 것은 대한민국에서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유일’하다거나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 초일류 미디어그룹 (구축)’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중앙미디어네트워크’는 중앙일보사의 주식지분 32.86%를 가진 1대주주로, 관련 계열사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유한책임회사(대표 송필호 중앙일보 발행인 겸 인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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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사의 주주 및 지분현황
겉으로 보면,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중앙일보사 지분 29.4%를 가지고 있어, 중앙미디어네트워크에 이어 2대 주주지만, 1대주주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지분을 10% 가지고 있는 등 사실상 최대주주나 다름없다.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다른 주주들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앙일보 계열사나 홍석현 회장의 가족들이 주요주주일 것으로 관측된다.
아파트형공장 지어 총 1,200여억원 분양수입 올리기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상 ’중앙일보 기업집단’은 중앙일보를 포함, 모두 44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다. 신문, 방송, 연예, 오락, 교육, 화물 운송, 골프 용품 유통, 경영 자문(컨설팅)과 심지어 부동산 개발 사업까지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구로동에 지하4층, 지상 18층의 아파트형 공장(명칭: JnK디지털타워; 대지 2,389평; 연건축 면적 17,213평) 1개동을 건설하여 작년 분양 수익 85억원을 포함하여 총 1,231억원의 누적수입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이 아닌 제조업에서 사업을 시작한 보통의 재벌들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이나 규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명실상부한 재벌이라 볼 수 있다. 44개의 계열사 중 영화, 비디오물,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 배급하는 ‘㈜제이콘텐트리’ 1개사를 제외한 나머지 43개 회사가 모두 비상장 회사다.
홍석현 동생 4명은 수십계 계열사 가진 보광그룹 별도 소유경영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홍석현 회장을 제외하고, 3명의 남동생과 여동생(홍라영 호암미술관 ‘리움’ 부관장) 등 네 형제자매가 소유·경영하는 ‘보광그룹’은 따로 있다.
보광그룹의 주요 계열사 중에는 24시 편의점 업계에서 가장 많은 가맹 점포를 가진 씨유(CU)와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스키 경기가 벌어질 보광휘닉스파크 등도 포함돼 있다. 프렌차이즈 편의점 씨유(CU)를 경영하는 법인은 ㈜비지에프(BGF)리테일로, 2012년 6월 ㈜보광훼미리마트에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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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이 회사의 주식 34.93%를 가진 1대주주이자 대표이사 회장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큰동생인 홍석조 전 광주고검장이다. 노무현 정부의 첫 법무부 검찰국장 등 검찰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홍석조씨는 광주고검장으로 재직할 당시, MBC 이상호 기자의 X-파일 보도를 통해 검사 후배들에게 삼성이 주는 ‘떡값’을 돌린 것으로 지목됐으나, 이같은 보도를 부인하고 광주고검장에서 물러 난 바 있다.
보광그룹은 창업투자, 광고대행, 방송 장비 제작, 각종 컴퓨터 부품 및 주변기기 제작, LCD와 반도체 제작, 온천과 골프장 개발, 관광 및 휴양 사업, 폐기물 수집 및 운반, 창고, 운수, 주류 중계 사업 등을 영위하는 계열사를 전부 합치면 60개가 넘은 적도 있다.
이병철 회장의 홍진기 감옥 면회로 시작된 혼맥

원래 별도의 이렇다 할 가업이 없던 홍석현 회장 가족이 짧은 기간 안에 우리나라 최대의 복합미디어그룹과 별도의 중견 재벌그룹을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결국 해답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1910-1987) 전 회장과 홍진기(1917-1986: 전 법무/내무장관) 전 중앙일보 회장의 혼맥(사돈관계)에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 홍진기씨의 4남2녀 중 맏이인 홍라희(호암미술관 리움 관장)씨다. 이건희 회장이 홍석현 회장의 매형이다.
이병철씨와 홍진기씨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이른바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민주혁명 과정에서 당시 홍진기 내무장관이 경찰의 발포 관련 책임자 중의 하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있다가,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인 1963년에 그를 풀어줬다.
홍 씨가 감옥에 있을 때, 나중에 ‘TK(대구-경북의 영문 앞글자: 사실은 ‘대구의 경북고’를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음) 대부’로 알려진 신현확(1920-2007) 전 국무총리의 소개와 제안으로 이병철 회장이 홍진기씨를 감옥으로 면회가면서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씨,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위해 언론사 설립   
두 가문 사이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쯤에서 3가지 의문을 던져본다.
하나는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는 형식상의 계열분리를 넘어서, 내용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한 것이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회장, 즉 처남-매부 사이의 관계, 세 번째는 홍석현 회장은 세계적인 종합미디어그룹을 완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우선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언론사를 설립한 배경부터 살펴본다. 다행스럽게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기 1년 전에 발행한 자신의 유일한 회고록인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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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 연합뉴스
“나는 생애에서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4·19와 5·16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이었다…(중략)… 그러나 1년여를 두고 숙려(熟廬)한 끝에 정치가에의 길은 단념했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데 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종합매스콤의 창설을 결심했다…(중략)… 그래서 박대통령과도 협의하였더니 찬의(贊意)를 표하면서 그 자리에서 홍종철 문교부장관(문화공보부장관도 지냄: 편집자 주)에게 전화를 걸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도록 지시하였다.” (호암자전 182-183쪽)
이병철 회장의 미디어그룹, 사돈 손 안에
이병철 회장이 아직 살아있다면, 회고록에서 솔직하게 고백한대로, 자신이 1965년 설립하고 씨를 뿌린 중앙일보와 동양방송(TBC: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KBS에 흡수통합됨)이 종합편성채널(JTBC)로 부활하여 거대한 복합미디어그룹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고 어떤 감회에 젖을까?
마냥 기뻐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맏아들 맹희는 미워했지만, 그토록 아끼고 애정을 쏟았던 장손인 이재현 씨제이그룹 회장이 배임과 탈세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는 과정에서 중앙일보가 보인 보도 태도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이보다 앞서,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진 종합미디어그룹의 주력사인 중앙일보가 이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가 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 관한 보도에서 이건희 회장 편에 서는 것을 보고 만족했을까.---------------------------------------------------------------------------------------------------

JTBC 보도, ‘이건희 회장 사후’를 대비 홍석현 회장의 야망을 드러낸 것인가?

[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맨얼굴 ⑤ ] 중앙일보 (2)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media@mediatoday.co.kr
우리나라 족벌신문사와 사주들은 ‘권력 그 자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재벌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는 입맛에 따라 선별적으로 하거나, 회사와 사주들의 이익(私益)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처럼 공격의 대상으로 지목되면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오보로 판결이 나도 좀처럼 지면을 통해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특징을 3가지만 꼽으라면, 거짓말, 뻔뻔함, 그리고 집요함을 든다. 목표가 정해지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이 이들에게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엄청난 ‘방송 무기’까지 안겨주었다. 이제 신문과 방송 모두를 가진 족벌언론과 사주들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대법원에서 탈세 확정판결을 받아도 대통령이 사면해 준다.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끝나면 물러나지만, 족벌언론 사주들은 대물림으로 ‘족벌언론 왕국’을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혼맥으로 얽히고 설킨 지배세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족벌언론 사주들부터 살펴본다. 독자와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편집자 주>


‘중앙일보의 종편채널 JTBC’는 14일 9시 뉴스를 통해 삼성그룹의 ‘노조 무력화 전략’이 담긴 문건을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입수했다며 단독보도했다. 놀랄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모든 언론이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불법 비리를 보도할 때도 중앙일보만 언론이기를 포기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침묵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종편채널 JTBC가 상법상의 별도법인이라지만, 중앙일보그룹 즉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주력 계열사로 한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JTBC가 다른 뉴스도 아니고, ‘삼성의 아킬레스건’의 하나라 볼 수 있는 무노조 고수를 위한 문건을 보도한 이유와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에서는 JTBC 사장이자 9시 뉴스 앵커인 손석희씨의 역할에 비중을 두기도 하지만, 이는 지극히 피상적인 분석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진짜 이유와 배경은 뭘까? 진실은 시간이 가면 금방 드러나게 돼 있다. 우선 몇가지 가능성과 배경을 짚어볼 수 있다.
JTBC, 보여주기 위한 차별화 vs 진짜 차별화 
첫째, JTBC의 차별화 전략일 가능성이다. JTBC가 출발부터 채널 포화 내지 과잉상태의 방송(종합편성)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 즉 다른 족벌신문들이 소유·경영하는 종편채널 3개와의 차별화 전략을 선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도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진짜 차별화, 즉 진정성 있는 차별화이고 다른 하나는 ‘보여주기 위한 차별화’다.

▲ 지난 2013년 10월 14일 JTBC 뉴스9 화면 갈무리.


후자라면, 즉 이번 JTBC 보도가 진정성 있는 ‘진짜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면, 생존경쟁이 더 치열하고 불투명한 신문 시장에서 중앙일보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런 ‘단독보도’가 JTBC나 중앙일보의 독자적이고 자발적인 탐사보도로 나타났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의 매개와 중재로 심상정 의원이 JTBC와 손석희 사장에게 제보한 것이라면, 이는 차원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기에는 JTBC의 이번 보도가 삼성그룹에 가할 타격이 너무 크거나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는 글자 그대로 ‘치명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보도는 손석희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삼성으로부터 중앙일보그룹의 ‘독립선언’인가?
둘째, 이번 보도가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사가 몇차례의 ‘공언(空言)’ 끝에 1999년 상법상의 계열분리를 발표했지만, 여전히 삼성과 ‘특수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기업지배 구조에서 완벽하게 독립한 것을 선언한 것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중앙일보가 삼성그룹으로부터 상법상으로 계열분리했다고 발표한 이후에도 양자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중앙일보가 삼성그룹으로부터 받았거나 받고 있는 특혜나 ‘내부거래’를 적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중앙일보사의 주주들과 보유 지분 내역 등 기업지배구조만 놓고 봐도 여전히 석연찮거나 베일에 가려져 있는 구석이 있다. 한때 중앙일보의 주식을 20.3%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삼성그룹의 계열사 혹은 관계자가 여전히 중앙일보사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다면 얼마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공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미디어오늘 / ‘삼성의 사보’ 역할에서 ‘홍석현의 왕국’으로]
삼성전자 법무팀에서 근무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1999년 중앙일보가 삼성으로부터 계열분리할 당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1대주주 자격을 얻는데 필요한 지분 확보를 위해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중앙일보사 지분을 매입할 자금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식명의신탁계약서를 비밀리에 작성해 두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김용철 변호사 자신이 경리를 담당하던 김인주씨의 지시로 문제의 주식명의신탁계약서를 직접 써 준 바 있는데, 주식 소유 명의자는 홍석현으로 하되 의결권은 이건희 회장이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중앙일보 위장 분리’였다는게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다.
김 변호사의 계속되는 증언이다. “내가 공개할 수도 없는 계약서를 왜 만드는지 물어봤더니, 김인주가 그래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 계약서는 한 부만 만들었다. 삼성만 가지고 있다. 중앙일보와 삼성 사이에서 이뤄진 돈 거래는 위장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원천이 비자금인지 여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계약서에 도장 찍은 것은 못 보았으나, 이건희의 인감은 김인주가 갖고 있었다.”
“그리고 8년쯤 지난 2007년, 양심고백을 통해 중앙일보 위장 분리에 대해 세상에 알렸다. 그러자 중앙일보 측은 즉각 반박했다. 내가 알린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계열 분리했다는 주장이었다. 삼성 역시 중앙일보 측 주장에 동조했다. 이로써 이익을 본 것은 홍석현이다. 홍석현은 이건희의 돈으로 중앙일보 대주주가 됐다. 그리고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홍석현에게 명의만 빌려줬던 이건희는 억울하게 됐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 참조
중앙일보의 계열분리가 완벽하게 이뤄지거나 기업지배구조가 이건희 회장에서 홍석현 회장 가문으로 명실상부하게 넘어왔다 하더라도, 중앙일보그룹 입장에서 삼성그룹의 물질적 지원을 배제하는 것은 여젼히 비현실적이다.
시도 때도 없이 삼성 돈 요구한 중앙일보의 자립 선언?
셋째, 중앙일보그룹과 홍석현 가문의 자금력과 부가 과거와 비교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축적돼 이제 삼성그룹의 ‘특혜’를 받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냐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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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하지만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심 고백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삼성, 특히 이건희 일가가 기분 나빠할 내용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보도하는 중앙일보의 태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중앙일보가 계열분리를 선언한 뒤에도,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보고 내용이 하루 두 번씩 삼성 구조본(구조조정본부: 현 미래전략실: 편집자 주)으로 전달됐다. 이걸 보며, 나는 ‘중앙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 삼성을 위해 일하는 사설 정보기관이구나’ 싶었다.”
“이처럼 중앙일보가 삼성에 종속돼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걸핏하면 삼성에 돈을 요구했다. 1999년, 재미교포 박인회(윌리엄 박)가 전직 안기부 직원인 공운영에게 넘겨받은 도청파일을 중앙일보가 사려고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이다. 박인회가 중앙일보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다기보다는, 중앙일보가 도청파일 속 정보를 탐내서 구매하려고 했다는 게 사실에 더 가깝다. 당시 박인회가 부른 가격이 10~20억 원 정도였는데, 중앙일보는 이 돈도 삼성더러 내달라고 했다. 당시 이학수가 이런 요구를 거절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중앙일보쯤 되는 회사가 고작 10~20억 원 때문에 손을 벌리나’라고 여긴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중앙일보는 수해 입은 지하주차장 수리비까지 삼성에 요구했다. 그래서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중앙일보 담당자가 몹시 힘들어 했다. 김인주는 사무실 창밖에 내다보이는 중앙일보 건물 끝에 있는 ‘J’자를 가리키면서 ‘도둑놈’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욕하면서도 삼성은 중앙일보가 손을 벌릴 때마다 대개는 돈을 쥐어줬다.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삼성을 생각한다’ 참조
매형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한 홍석현의 위상 과시?
넷째, 이번 보도의 배경을 이건희 회장과 처남인 홍석현 회장의 관계나 ‘위상 재정립’ 차원에서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모르는 복잡미묘한 사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홍석현 회장은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 제공하는 불법 정치자금이나 뇌물성 떡값을 정치인 등에 심부름하는 과정에서 상당액수를 가로채는 이른바 ‘배달 사고’를 낸 적도 있고, 홍 회장 형제가 소유·경영하는 보광휘닉스파크를 건설한 삼성물산이 건설비용을 과다계상한 후 나중에 차액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홍 회장이 수십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보광그룹과 중앙일보의 탈세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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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더구나, 홍 회장은 ‘한국의 베를루스코니’가 되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가진 적이 있다. 그가 그런 정치적 꿈을 접었다는 흔적은 아직 발견하기 어렵다. 그의 야망이 세간에 드러난 사건이 바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홍석현 회장의 밀약설이다. 나중에 홍석현 회장이 일부 실토한대로 당시 중앙일보는 사실상 이회창 대선 캠프의 비밀 정보기관처럼 움직여 엄청난 비난과 후폭풍에 시달린 바 있다.
그 이후 홍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주미 한국 대사로 발탁돼 근무하다 국가정정보원이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홍 회장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 이른바 ‘X-파일’ 보도를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성 떡값을 돌리는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드러나 6개월만에 주미 대사직에서 물러난 바 있다.
홍 회장 입장에서는 매형인 이건희 회장을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홍 회장은 또 시간이 자신의 편이며 지금이 그 적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승부나 결과를 점치기에는 이르다. 그동안 이건희 회장과 구축한 ‘왕국’과 삼성그룹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성그룹이 이번 JTBC 보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또한 JTBC와 중앙일보가 이번 보도의 연장선에서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에 관한 보도를 어떻게 이어가는지를 지켜보면 진실은 바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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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 ‘이병철 회장’

[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맨얼굴 ⑥ ] 중앙일보(3)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media@mediatoday.co.kr
우리나라 족벌신문사와 사주들은 ‘권력 그 자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재벌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는 입맛에 따라 선별적으로 하거나, 회사와 사주들의 이익(私益)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처럼 공격의 대상으로 지목되면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오보로 판결이 나도 좀처럼 지면을 통해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특징을 3가지만 꼽으라면, 거짓말, 뻔뻔함, 그리고 집요함을 든다. 목표가 정해지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이 이들에게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엄청난 ‘방송 무기’까지 안겨주었다. 이제 신문과 방송 모두를 가진 족벌언론과 사주들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대법원에서 탈세 확정판결을 받아도 대통령이 사면해 준다.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끝나면 물러나지만, 족벌언론 사주들은 대물림으로 ‘족벌언론 왕국’을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혼맥으로 얽히고 설킨 지배세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족벌언론 사주들부터 살펴본다. 독자와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편집자주>


중앙일보, 이맹희-이건희 소송전 계기로 CJ-이재현 ‘난타’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1910-1987) 전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1931년생; 전 제일비료 회장)씨와 3남인 이건희(1942년생) 삼성그룹 회장 사이의 ‘형제 전쟁’은 ‘아주 오래된, 현재 진행형’이다.
이병철 회장 후계 구도나 경영권 세습과정에서 시작된 싸움이지만, 현재는 ‘비정하고 적대적 양상’을 띠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지휘아래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하는 동안 맏형인 이맹희씨는 은둔생활로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멀어져 갔다. 극히 일부 가족을 빼고는 그의 거주지나 소재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 작년 2월 이맹희씨가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형제 전쟁이 되살아나 세상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소송전을 계기로 이건희 회장이 자신보다 11살 위의 형을 상대로 좀처럼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쏟아내 세상 사람들을 두 번 놀라게 만들었다.
두 형제 사이의 소송전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중앙일보의 맨얼굴을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널리 알려진대로 이병철 회장이 1965년 설립한 신문으로, 1999년 계열분리될 때까지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처럼, 이병철 회장도 한 때 직접 정치에 뛰어들려고 1년 동안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심 끝에 직접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권력보다 무서운 ‘언론권력’을 선택한 결과가 중앙일보와 TBC(1980년 언론통폐합 때 KBS에 흡수합병) 등의 설립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기 1년 전인 1986년 발행한 자신의 유일한 회고록인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이에 관해 비교적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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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이병철탄신100주년 기념식’에서 이병철 삼성 전 회장의 생전모습을 담은 추모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이병철씨, ‘정치보다 더 강한 힘’ 위해 언론사 설립 
“나는 생애에서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4·19와 5·16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이었다…(중략)… 그러한 기업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정부 운영과 국가 방위를 뒷받침하는 이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라고들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된다. 이와 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그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동기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1년여를 두고 숙려(熟廬)한 끝에 정치가에의 길은 단념했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데 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종합 매스콤의 창설을 결심했다.”
“언론은 그것을 구사하기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한다. 펜이란, 언론이란, 이 양면의 성격과 기능을 지닌 ‘양(兩)날의 검(劍)’인 것이다. 이것을 충분히 인식한 바탕 위에서 자율의 억제가 통하고 균형감각이 잡힌 힘 있는 종합 매스콤을 만들어 그것을 육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대통령과도 협의하였더니 찬의(贊意)를 표하면서 그 자리에서 홍종철 문교부장관(문화공보부장관도 지냄: 편집자 주)에게 전화를 걸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도록 지시하였다.” (호암자전 182-183쪽)
중앙일보가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밝힌 설립 취지와 목적에 맞는 언론 정도의 길을 걸었는지, 그 평가는 국민과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앙일보는 사실상 ‘삼성의 사보’ 역할에 충실히 해 왔다는 사실이다.
창간 이후 삼성과 이맹희, 이건희씨 등 창업주 가문에 관한 부정적인 소식은 일절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 보도해 온 것으로 비판받아 온 중앙일보가 이맹희씨의 소송 제기 이후, 맹희씨의 장남인 이재현(1960년생) 회장의 배임, 탈세 혐의 등에 관해서도 ‘예외없이’ 보도하는 등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씨제이그룹 이재현 회장의 탈세와 배임 등의 규모가 워낙 커 법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고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이지만, 이재현의 입장에서는 장손인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살아있다면 중앙일보가 그렇게 매정하게(?)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서슴지 않았을까 상상할 지도 모른다.
이병철 회장은 둘째 아들인 이창희(1933-1991: 전 새한그룹 회장)씨가 삼성그룹의 사카린 등의 밀수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장문의 투서를 박정희 대통령에 보낸 것으로 알려지자, 장남인 맹희씨가 뒤에서 부추긴 것으로 판단하고 맹희씨를 가문에서 ‘파문’한다. 이병철 회장은 차남 창희씨가 잘못했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용서를 구하자 어느 정도 용서했지만, 결백을 주장하는 장남 맹희씨에 대해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용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이병철 회장도 부인 박두을(1906-2000) 여사와 자신을 모시고 산 장손인 이재현 회장과 손부(孫婦)인 김희재씨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현씨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할아버지 몰래 씨티은행에 입사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그만두게 하고 제일제당(당시 삼성그룹 주력 계열사)에 입사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지난 7월 18일 6,200억원의 불법 비자금 조성과 546억원의 조세포탈 및 963억원 횡령혐의로 구속된 이재현 회장은 만성신부전과 희귀한 근육 위축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CMT)’ 등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20일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허가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 8월 28일 동갑내기 부인 김희재씨의 신장을 이식받고 회복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 회장이 아직 살아있다면, 회고록에서 솔직하게 고백한대로, 자신이 설립하고 씨를 뿌린 중앙일보와 동양방송(TBC)이 종합편성채널(JTBC)로 부활하여 거대한 복합미디어그룹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고 어떤 감회에 젖을까? 아울러, 자신의 맏아들 맹희는 미워했지만, 그토록 아끼고 애정을 쏟았던 장손 재현씨가 배임과 탈세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는 과정에서 중앙일보가 보인 보도 태도를 지하에서 보고 있다면 통곡하지 않을까?---------------------------------------------------------------------------------------------------

홍석현, 울면서 청와대를 떠나다

[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맨얼굴 ⑦ ] 중앙일보(4)-홍석현의 걸어온 길과 정치적 야망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media@mediatoday.co.kr
언론과 권력은 대립적이다. 본질적으로 대립적이어야 한다. 언론은 돈을 가진 금력, 즉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입법·사법·행정부를 비롯한 정치권력을 감시할 의무를 지닌다. 그런 차원에서 언론을 ‘제4부(The Fourth Estate)’라 부른다. 그런데 겉으로는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는 우리나라 언론, 특히 족벌언론과 사주들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이 되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적 이익과 정략적 목표 추구에 혈안이 돼 있다. 이제는 종편채널이라는 방송까지 허가받은 언론족벌 사주가 이탈리아의 언론과 정치경제를 거덜 낸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수상처럼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거나 제4부가 아니라 ‘제1권력’이 되겠다고 설칠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베를루스코니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족벌언론 사주가 바로 홍석현 중앙일보미디어그룹 회장이다. 홍석현이 걸어온 길과 그의 정치적 야망을 짚어 본다. <편집자 주>
홍석현, 울면서 청와대를 떠나다
1985년 1월 어느 날.
홍석현은 울면서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 생활 1년3개월만이었다. 청와대를 떠날 때 그의 직책은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 강경식의 (특별)보좌관’이었다.
현재 중앙일보미디어그룹 회장인 홍석현이 청와대를 떠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에서 그것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의 보좌관이란 직책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언론도 그에게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석현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 당시부터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경력관리 즉 요샛말로 스펙 쌓기란 관점에서 볼 때 ‘구중궁궐’이나 다름없는 ‘권부의 핵’ 청와대를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전두환, 홍석현 특별승급 추진한 비서실장 강경식 해임
그렇다면 홍석현은 어떻게 청와대에 입성하고, 또 강경식 비서실장과 함께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을까? 비밀과 열쇠는 역시 ‘사람과 혼맥’에 있다. 우선 홍석현의 경력부터 살펴본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홍석현은 1977년부터 세계은행(IBRD)에 근무하면서, 1978년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 1980년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3년 3월 세계은행 근무(economist)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국내에서 처음으로 갖게 된 직책이 강경식 재무부장관의 비서관이다. 강경식(1936년생)씨는 김영삼 정부 당시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인 1997년 11월까지 경제부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출두
▲ 중앙일보·JTBC 회장. ⓒ 연합뉴스
재무장관 비서관에서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지만,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12회 고등고시 행정과)를 통해 관계에 들어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의 주요 보직을 거친 강경식씨가 1983년 10월 재무장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발탁되자, 강경식 재무장관의 비서관이던 홍석현씨도 ‘청와대 비서실장 특별보좌관’이라는 자리를 얻어 청와대로 옮긴다.
특정 분야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특별보좌관’을 임명하는 경우는 더러 있으나, 청와대 비서실장의 ‘(특별)보좌관’을 임명하는 경우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글자 그대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든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던 셈이다.
홍석현씨가 청와대에서 ‘조용히’ 근무했으면 울면서 청와대를 떠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홍 씨는 자신을 위해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 청와대 근무를 허용한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행정고시 등을 통해 10년 정도 정부 각 부처에 근무하고 있던 자신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동창들과 비교해 1-2직급 더 높은 직급, 즉 ‘특별승급’을 요청한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은 행정안전부에서 공무원들의 인사를 다루지만, 당시는 행정자치부로 통합되기 전 총무처에서 청와대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인사 문제를 다룰 때였다. 청와대 인사라 하더라도 총무처의 사전 심사와 절차를 거쳐야 했던 시절이다.
전두환 대통령, ‘재벌 X들은 왜 이 모양이야’ 진노
홍석현의 특별승급에 관한 총무처 인사 담당자의 문제 제기와 청와대 내부에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최종 결재안’은 전두환 대통령 앞에 제출된다.
청와대 인사 실무자는 홍 씨의 특별승급에 관한 청와대 비서실과 총무처 등 관료사회 내부의 뒷말과 반발 분위기를 전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결재안을 올리자, 이를 들은 전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재벌 X들은 왜 전부 이 모양이야”라고 소리치면서 결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 대통령의 ‘진노’는 결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강경식 비서실장마저 해임하기에 이른다.
당시 홍석현씨의 부친 홍진기(1917-1986: 법무장관/내무장관 역임)씨는 중앙일보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낼 때이고, 홍석현의 누나인 홍라희(1945년생)씨가 이건희(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씨의 부인이고, 중앙일보가 삼성그룹의 계열사였으므로, 전두환 대통령이 홍석현을 ‘재벌가’의 일원으로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30대 중반을 넘긴 홍석현씨는 결국 울면서 청와대를 떠나, 3개월 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국개발연구원에서 1년반 가량 근무한 홍 씨는 부친(홍진기)이 작고한 두 달 뒤인 1986년 9월 삼성코닝 전무로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에서 주주이자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삼성코닝 부사장직을 끝으로 삼성코닝을 떠나, 1994년 3월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사실상 중앙일보의 최고경영책임자(CEO)가 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4년 12월 17일 노무현 정부는 홍석현 중앙일보 대표이사 회장을 외교 의전(protocol)에 따른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대사 접수국의 사전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미 대사 내정자로 발표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외교 의전도 무시하는 사실상의 ‘비 문명국가’임을 온 세계에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와대가 외교 의전절차도 무시하고 주미 대사 내정자를 발표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중앙일보가 자신의 대표이사 회장의 주미 대사 내정 사실을 아그레망이 날 때까지, 아니 최소한 정부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정부가 대사 내정 사실을 발표하기도 전인, 그날 아침 신문에 이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사실이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주재국인 미국 정부가 대사 내정에 대한 사전동의(아그레망)를 할 지 여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중앙일보는 홍 씨의 다음 목표가 주미 대사직이 아니라 유엔 사무총장직 도전이며, 정부가 “홍 회장의 유엔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라는 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족벌언론과 족벌언론 사주의 맨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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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처 홍씨 집안 내력

제 목
이건희 처 홍씨 집안 내력
작성일
2013-12-14
작성자
대한민국 한줌 집안의 현주소…
Chris Kim
홍진기, 김윤남의 평창동 5백평 저택의 가정부를 하셨던 69세 김옥희님 2013년 12월14일 인터뷰….
4년전에 평창동 홍진기 저택에서 간병인 겸 가정부를 약 4개월 정도 하셨다고 한다. 당시 80세를 넘긴 홍진기 처 김윤남.. 24년생 할머니(올해 90세) 홀로 거처하는 5백평짜리 저택에 6명이 근무한다… 자신을 포함한 가정부 2명, 주방, 경비 3명… 경비들은 모두 30대초반의 젊고 훤칠하며 잘생긴 이들로 뽑으며 이들이 교대로 근무한다. 정원일, 경비 등이 이들의 몫이다.
넓은 집안 구석구석엔 CCTV가 설치되어 있으며 옴쭉달싹할 수 없는 구조이다.. 냉장고에 온갖 사철과일들과 음식이 그득그득해도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다. 재벌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배고프다. 왜냐하면 재벌들은 이들을 노비로 생각하지, 식욕이 있어서 식사시간이 필요하며, 사고를 할 줄 아는 두뇌를 가진 동류의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랫것들의 삶과 생활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전~혀~ 알지도 않는다. 그래서 식사 등의 생명현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아래것들간의 서열규칙과 그들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귀족재벌들의 우아한 식사가 끝나면 아래것들이 모여 주방아줌마가 제공하는 만큼의 찌끄레기만 먹어야 한다.. 아무리 음식이 넘쳐서 썩어가도 더 욕심내면 안 된다… 이 분의 경우, 딱 한 번 몰래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를 먹어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그런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너무나 맛있어서… 다행히 들키거나 문책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홍진기 처이자 홍라희, 홍석현, 홍라영, 홍석조의 엄마인 김윤남 할머니는 키가 웬만한 남자들보다 크고, 귀는 부처님 귀처럼 크고, 늙었어도 미모에 목소리가 그렇게 예뻤다고 한다… 배에는 개복수술 자국이 있는데 위아래로 십센치 이상 크게 흉터가 있고 거미발모양으로 양옆으로도 흉터가 가지처럼 이어져 있어서 외출시에는 배에 위아래로 긴 재생테이프를 붙이고 나간다.
말상대가 없으니 간병인을 상대로 자기 인생 얘기, 자기 식구 자랑을 늘어놓는 게 일이라 한다.. 호남은행 부사장이었던 애비 김신석(1896~1948, 부산상고 졸)이 부자여서 아쉬운 것 없이 자랐는데 홍진기에게 시집와서 그렇게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판사가 될 정도로 머리는 좋았겠지만 원래 집안은 가난했던 시댁에서 이것 해와라, 저것 해와라 하면서 요구하는 게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애비 김신석은 호남은행 설립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대한민국 공식 친일파인 현준호(1889~1950)와 사업동반자… 현준호는 전남방직 회장인 친일매판자본가로 역시 대한민국 공식 친일파인 김용주(1905~1985)와 사돈간이다… 김용주의 아들 김무성이 요즘 객끼와 망발, 범법과 무법의 카리스마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누나(김문희)의 딸인 현정은 현대회장(1955~)이 김무성의 조카이다… NLL녹취록을 불법적으로 훔쳐보고 불법적으로 유포시켰는데도 언론도 검경도 국민도 까딱않는 것 보면 과연 우리가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가 가끔 의문이 든다….
가끔 홍석조가 어머니 문안차 오는데 파카 대충 껴입고 오는 그는 그 집안에서는 인물도 못난편에 키도 엄마보다도 작다고 한다…. 광주고검장이던 그가 참여정부 시절 삼성 떡검 X-file이 유출되어 삼성과 검찰간의 뇌물브로커역할을 함이 다 밝혀진 상황에 옷을 벗어야 했고, 그 이후 편의점사업으로 훼미리마트를 했는데 그게 엄청 잘 되었다 한다. 2200개를 했는데 사실 훼미리마트를 운영하는 사장(점주)들은 죄다 망해서 나가는데 웃대가리인 보광그룹 홍석조만 돈을 버는 구조였다고 한다… 이후 4천여개로 늘어 국내 최대 편의점업계이며 현재는 CU로 이름을 바꾸었다. 홍씨 집안은 다 평창동에 500평짜리 저택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홍진기 처인 김윤남이 돈만 생기면 평창동에서 이쪽에 5백평, 저쪽에 5백평 하는 식으로 땅을 사놓았다고 한다.
노신영(1930~) 전 총리 겸 안기부장 아들(차남) 노철수(중앙데일리,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미주운영팀장)와 결혼시킨 차녀 홍라영은 라움미술관 부관장이면서 동시에 빈폴을 소유하고 있다.. 홍라영의 목소리가 그렇게 은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너무 예뻤다고 한다… 특히 엄마 김윤남 저택에 있는 자기방에서 자고 막 일어나서 위층에서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 같았다고 한다….
훼미리마트 사장입네, 빈폴점장입네 하면서 자기들이 기득권인 줄 착각하고 새누리당 찍고 중앙일보 펼쳐보는 등신들은 그들의 마름역할이나 하면서 충성을 다해 주구노릇하다가 늙거나 쓸모없어지면 용도폐기될 거면서 .. 한치앞도 못보고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통해 99% 민중들을 1%재벌들을 떠받치는 계급사회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언제쯤 정신줄들을 잡으시려나~~ㅠㅠ
빈폴 , 로가디스 , 갤럭시 , 엠비오 , 지방시 , 후부 , 구호 , 띠어리… 좋아하는 브랜드인가? 이런 브랜드를 소비자들이 좋아하면 할수록 결국 돈은 삼성가로 흘러들어간다. 신세계백화점 2곳, 이마트와 홈플러스 112곳,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93곳, 보광 CU 4천여곳, 뚜레쥬르 프랜차이즈 1100여곳, 차이나 팩토리 6곳, 투섬플레이스 20여곳, 빕스 70여곳, 피셔스 4곳, 카페 소반 2곳, 더플레이스 2곳, 시푸드 오션 8곳, 엠키친 3곳, 웰리앤 푸드코트 4개소, 부산, 광명 KTX와 제주, 김포공항 외식업체와 커피전문점에서 식사를 하면 할수록 CJ(삼성가 이재현, 이병철의 장손)로 우리 돈이 흘러들어간다…
종합오락채널 ‘tvN’, 대한민국 대표영화채널 ‘채널CGV’, No.1 스포츠채널 ‘Xports’, 스타일리쉬 엔터테인먼트채널 ‘XTM’, 한국의 대표 음악&엔터테인먼트 채널 ‘Mnet’, No.1 라이프스타일 채널 ‘올’리브’, 애니메이션 채널 ‘챔프’,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전문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오리지널 음악채널 ‘KM’, 그리고 국내 최초 데이터 연동형 서비스 오디오 채널 ‘Ozic Mnet’, CJ 엔터테인먼트… TV를 보아도 영화를 관람해도 삼성가가 돈을 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서울, 부산 웨스틴조선호텔에 투숙하거나, 신세계백화점, 이마트에서 쇼핑을 하거나, 신세계푸드에서 식사를 하거나, 까르네스테이션, 보노보노를 이용하면 역시 삼성가 신세계의 정용진이 돈을 번다….
일본 이토추상사와 보광그룹이 공동 합작법인으로 설립한 훼미리푸드… 편의점에 제공되는 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등을 구입시 삼성 X-file의 주인공 홍석조가 돈을 번다… 물론 보광그룹의 주주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홍석준 SDI 부사장도 같이 돈을 번다…
거제호텔, 호텔신라, 제주신라에 투숙하면서 돈을 쓰면서 즐거웠다면… 이건희와 홍라희의 딸이자 반민족친일파 홍진기의 손녀인 이부진도 당신의 돈을 챙기면서 즐거웠을 것이다… 그녀는 작년 100대기업 중 유일한 여성 CEO이기도 하다…
중앙일보를 매일아침 받아보는 이만도 130만명(유료부수 92만명, 2002년 기준)이다.. 하지만 홍석현을 중앙일보로만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중앙Sunday, 영어신문 ‘Korea JoongAng Daily’ 등 5개 일간신문, 종편 JTBC, Q-TV, J골프, 카툰네트워크 등 4개 방송채널, 3개 인터넷사이트, 뉴스위크, 포브스 포함 15개 잡지까지 모두 27개의 매체 발행 혹은 소유, 경영하고 있고, 뮤지컬 제작사 ‘설앤컴퍼니’ 드라마제작사 ‘드라마하우스’ 대형복합상영관 ‘메가박스’.. 신문은 물론, 방송, 영상콘텐트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수직계열화, ‘중앙미디어네트워크’(최대주주)를 통해 홍석현과 가족들이 소유한 거대한 ‘중앙일보 기업집단’!!
‘중앙일보 기업집단’은 중앙일보 포함, 44개의 계열사(43개가 비상장)를 가지고 있다. 신문, 방송, 연예, 오락, 교육, 화물 운송, 골프용품 유통, 경영자문(컨설팅), 심지어 부동산 개발 사업까지~~ 최근 구로동 지하4층, 지상18층 아파트형 공장(JnK디지털타워, 2400평, 연건축면적 17,200평) 건설하여 분양수익 86억 포함, 1231억 누적수입 올린 명실상부한 재벌이다…
삼성떡값 녹취건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광주고검장인 동생 홍석조(현재 CU 회장) 등 네 형제자매가 소유, 경영하는 ‘보광그룹’은 편의점 업계에서 가장 많은 가맹점포를 가진 씨유(CU)와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보광휘닉스파크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업투자, 광고대행, 방송장비 제작, 각종 컴퓨터 부품 및 주변기기 제작, LCD, 반도체 제작, 온천과 골프장 개발, 관광 및 휴양사업, 폐기물 수집 운반, 창고, 운수, 주류 중계 사업 등 영위 계열사가 60개가 넘는다…
친일판사(공식 친일파)이자 4.19 당시 발포명령 책임자인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홍진기 전 법무/내부장관(1917~1986, 홍석현, 홍진기, 홍라영의 애비..)… 그는 첫딸 홍라희(전라도의 기쁨)는 삼성 이병철 며느리로, 장남 홍석현은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사위로, 차녀 홍라영은 전두환 안기부장 노신영 며느리로 보냈다…
홍진기의 자랑스러운 아들 홍석현은 무려 1071개의 차명계좌 이용 탈세로 대법원 실형(징역년, 집유4년), 벌금 30억 확정판결을 받고도 주미대사에 내정되는 신공을 보여주었고, 공식친일파이자 4.19 시민대상 발포의 주역인 홍진기를 기린 홍진기 창조인상을 제정하여 ‘싸이’(오빤 강남스타일), 권성훈 서울대 전기정보공학교수, 김승근(통영국제음악제 공연기획자) 등 사회문화전반에 걸친 유명인사들을 5천만원의 미끼로 낚아올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올해 들어서는 국뻥부와 함께 독립군들을 발기발기 찢어죽인 악행으로 유명한 간도특설대 백선엽을 기려 백선엽상을 만들어 역시 5천만원의 미끼를 드리워넣었으며, 최근에는 특허청과 함께 세종대왕상·충무공상·지석영상·정약용상(특허기술상)을 후원하여 스마트냉온정수기를 만든 웅진코웨이의 과장 3명, 엔유씨전자 발효기 개발진, ‘피부미용 마사지기’를 만든 지엔네이처 황원우, ‘고효율 태양전지’를 개발한 ㈜LG이노텍 이동근 선임연구원, 유효사거리가 500m이고 공중에서 폭발하며 파편이 퍼지는 공중폭발탄을 발사하는 소총을 만든 국방과학연구소 최의중 팀장 등 5명 등을 중앙의 악한 카르텔(evil cartel)에 끼워들이고 있다.
손석희 같은 인물을 사장으로 영입하는 영특함을 보이며 반민족역적의 가문을 이어가는 77년생 37살 신예 홍정도 jTBC 부사장.. 홍석현의 사랑스러운 장남이다. 182센티의 훤칠한 키에 뛰어난 머리, 수려한 외모… 2006년 5월29일 서울대 공대 윤재륜 교수(재료공학부)의 장녀, 정말 예쁘고 똑똑하고 나무랄 데 없는 윤선영씨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주례하에 결혼했다… 홍정도 부사장은 유신헌법 제정과 철권독재에 앞장섰던 신직수(1927~2001)의 손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부의 30%를 거머쥔 악의 핵심 이건희가 그의 고숙이다…
1%.. 인구 대비로는 정말 한줌도 안 되지만 그 영악함과 간교함, 악랄함과 교묘함에 있어서는 신묘함을 넘어서 신의 경지에 다다른 친일부왜독재 카르텔…. 그 중심에 있는 1대 홍진기(신석).. 2대 홍라희(거니 부인)-홍석현(신직수 사위)-홍라영(노신영 며느리).. 3대 홍정도-홍정현(허광수 며느리 GS라인.. 조선-중앙-재벌 거미줄 혼맥의 중심)…
99% 대한민국 민중들에겐 그들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깨부숨으로써 진정한 서민과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 지혜가 있을까? 눈꼽만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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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 고비 때마다 등장하는 홍석현 가문

역사의 물길 돌리고자 했던 아버지와는 다른 길 가야 17.03.22 11:32l최종 업데이트 17.03.22 11:32

박근혜 탄핵을 끌어낸 촛불 혁명은 다음 단계인 박근혜 구속과 정치개혁을 향해 달리고 있다. 정치개혁 단계가 완성되면,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새 나라'가 된다. 그런데 이 중대한 고비에서 홍석현이란 인물이 등장해 시선을 끌고 있다. 

지난 18일 <중앙일보> 및 JTBC 회장직 사퇴 의사를 밝힐 때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홍석현은 "최근 몇 개월, 탄핵 정국을 지켜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라면서 "광화문광장의 꺼지지 않는 촛불과 서울광장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며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고뇌에 잠기기도 했습니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자신의 회장직 사퇴가 촛불 혁명으로 인한 심경 변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홍석현은 "오랜 고민 끝에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한 뒤 "구체적으로 저는 남북관계, 일자리, 사회통합, 교육, 문화 등 대한민국이 새롭게 거듭나는 데 필요한 시대적 과제들에 대한 답을 찾고 함께 풀어갈 것입니다"란 의지를 천명했다. 

이메일 내용을 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홍석현 전 회장이 국가 지도자급 위치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게 분명하다. 촛불 혁명으로 대한민국이 기로에 선 지금, 이 나라를 모종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하는 게 확실하다. 


 홍진기.
 홍진기.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시민혁명의 고비 때 등장해서 역사 흐름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시도는 홍 회장의 아버지인 홍진기한테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17년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한 홍진기는 일제강점기 막판인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경성지방법원과 전주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해방 뒤 이승만 정권에 참여한 홍진기는 정권 2인자 이기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1959년에 이기붕 집을 출입하면서 선물 공세를 펼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 <전 민회의장 이기붕가 출입인 명부>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그는 단순히 이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권의 '두뇌'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까지 받았다. 이 정권에서 그는 한일회담 대표와 법무·내무 장관 등을 역임했다.

4.19 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 홍진기

그런데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월 혁명의 열기가 뜨거워지던 상황에서, 홍진기는 이 열기를 끄겠다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3월 23일 치안 책임자인 내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1960년 판 촛불 혁명의 소방수 역할에 뛰어들었다. 혁명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혁명의 불줄기를 끄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같은 의도 하에 홍진기가 벌인 대표적인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4월 19일의 발포 명령이다. 이로 인해 경무대(청와대)를 향해 평화 행진을 하던 시위대한테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고, 이날 서울 시내에서 102명이 경찰 총격으로 사망하고 46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것은 4월 19일 하루의 통계일 뿐이다. 이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홍진기였다.

1960년 6월 1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처음 한동안은 서울시경 유충렬 국장이 발포 책임자로 지목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유충렬의 배후에 홍진기 내무장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 보도에 따르면, 4월 19일 오전 9시 경무대에 들어간 홍진기는 오후 1시경 유충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태가 위급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연락이었다. 이에 대해 홍진기는 "사태가 위급하면 발포하시오"라고 명령했다. 

 4월 혁명. 서울시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4월 혁명. 서울시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홍진기는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왕명'을 조작하려 했다. 2시 40분에 대통령이 서명한 경비 계엄령이 그보다 앞선 1시에 서명된 것처럼 조작하려 한 것이다.

비상계엄이 발포되면 계엄사령관이 계엄지역의 행정·사법 사무를 관장하는 데 비해, 경비계엄이 발포되면 사령관이 해당 지역의 행정사무만 관장한다. 이 같은 경비 계엄령의 서명 시각을 조작함으로써, 홍진기는 1시경에 이뤄진 자신의 발포 명령이 대통령의 명령에 의한 것처럼 꾸미고자 했다.

이처럼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정치와 민생파탄을 응징하고 새로운 민주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1960년 판 촛불의 열망에 대해 발포명령으로 응답했다. 2016년 연말에 '촛불은 곧 꺼질 것'이라는 엉터리 예언을 한 김진태보다도 훨씬 나쁜 사람이었다. 홍진기는 '촛불아 꺼져라'라고 저주하는 김진태의 망언 수준을 뛰어넘어, 촛불을 총으로 끄려 했던 인물이다. 그런 식으로 역사의 불줄기를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홍진기는 그 일로 인해 1961년 9월 30일 혁명재판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이동연의 <아! 대한민국, 재벌공화국>에 따르면, 홍진기는 삼성그룹 이병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삼성 이병철의 구명 운동으로 사면되었다. 후에 역시 이병철의 도움으로 <중앙일보>의 사주가 되고, 두 사람은 사돈이 되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4월 혁명 뒤에 재판을 받는 홍진기(왼쪽).
 4월 혁명 뒤에 재판을 받는 홍진기(왼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발포 명령 외에 또 다른 방법으로도 홍진기는 역사의 물살을 바꾸고자 했다. 시민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 정국을 국회가 주도하는 개헌 정국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런 식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기붕 사퇴 고려 성명에도 개입

이를 위해 홍진기가 벌인 일이 이기붕의 '사퇴 고려 성명'(1960년 4월 23일)에 개입하는 것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부통령 당선자 신분에서 사퇴하는 것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장난 같은 성명서가 나오는 데 개입했던 것이다.

<이화사학연구> 제40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혜영의 '4·19 직후 정국수습 논의와 내각책임제 개헌'이란 논문에 따르면, 애당초 이기붕이 준비한 것은 사퇴 고려 성명이 아니라 사퇴 성명이었다. 발표 당일 아침 홍진기 등이 이기붕을 찾아가 설득 작업을 벌인 끝에 '사퇴한다'가 '사퇴를 고려할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홍진기 등의 입김으로 새로 작성된 성명서에는 '사퇴 고려'뿐 아니라 '내각제 개헌을 포함한 정치개혁을 고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싫어하는 내각제 개헌을 수용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일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 이런 문구를 발표해서 여론을 바꾸고, 이승만 하야를 촉구하는 국민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겠다는 게 홍진기의 계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 정권을 살려내고 4월 혁명을 무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4월 혁명이 결과적으로 흐지부지하게 된 데는 홍진기 같은 이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시민혁명을 무산시키기 위한 그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기에, 4월 혁명으로 출범한 민주당 정권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로 시민혁명이 결국 무산되고 만 것이다.


손석희의 jtbc 뉴스9가 또 삼성을 ‘깠다’. 이번에는 단독보도다. 삼성 불산누출과 관련해서 삼성의 안전관리를 진단한 보고서를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보고서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 보도했는데 사실만 전달하고 있지만 울림 자체는 크다. 일단 전파를 통해 영상으로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볼 수 있는 곳은 현재 jtbc뿐이다. 그것도 기사 두 꼭지를 통한 심층보도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런 보도를 놓고 '성역없는 손석희의 날카로운 비판'이라는 칭호를 가져다주기에는 어쩐지 좀 걸린다. 그것은 '중앙미디어그룹 = 삼성'이라는 등식 하에서 존재하는 찬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jtbc가 아니어도 삼성을 비판하는 언론은 없지 않다. 하지만 jtbc에게 유독 찬사가 몰리는 이유는 jtbc와(정확히는 중앙미디어그룹과) 삼성을 둘러싼 모종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중앙에서 삼성을 비판하다니!'라는 충격적인, 어쩌면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광경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jtbc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것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 jtbc의 '돈줄'은 삼성이 아니다
애당초 삼성과의 관계는 jtbc가 나올 때부터 '명분'에 불과했다. 중앙미디어그룹의 홍씨 가문과 삼성그룹의 이씨 가문은 사돈관계라는 명분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세대 삼성(이병철)과 중앙(홍진기)의 관계는 그러했다. 삼성의 안기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중앙일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돈관계로 맺어진 두 가문의 관계가 돈독했다. 하지만 삼성은 1세대 수장 이병철 회장 사후 수많은 분화를 겪었다. 크게 CJ, 삼성, 신세계, 보광으로 나뉠 수 있는데 CJ의 경우 이맹희 씨의 장남 이재현 회장이 이끌고 있고 삼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이건희 회장이 이끈다. 신세계는 이명희 회장,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보광그룹의 실질적인 리더가 바로 홍석현 회장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CJ와 삼성의 관계는 이맹희 씨의 재산분할 청구로 인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혈육간에도 '돈 문제'가 얽히면 쳐다도 안 보는 게 재벌이다. 그런데 혈육도 아닌 사돈지간에서 단순히 혼인관계 때문에 협력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그 때문일까. 홍석현 회장은 종편이 출범할 즈음 삼성코닝의 지분을 완전히 매각했다. 대부분 jtbc의 자금이 홍 회장이 가진 삼성코닝 지분의 배당금에서 나오리라 예상한 사람들은 의외의 선택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삼성코닝 지분은 홍 회장과 삼성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마지막 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지분이 없어지면서 홍 회장과 삼성은 완전히 남과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모두가 알던 것처럼 jtbc가 삼성의 방송국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적어도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명분상 가지고 있던 지분마저 처분된 상황에서 더 이상 jtbc가 삼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손석희의 jtbc행을 두고 세간의 우려를 정확히 보여준 것이 바로 jtbc의 예능프로 에서 나온 허지웅의 발언이었다. “손석희 체제의 jtbc가 삼성을 깔 수 있느냐"는 허지웅의 그 발언 말이다. 꽤 강하게 들어간 발언이어서 많이 우라까이도 됐다. 하지만 애당초 손석희가 jtbc의 사장으로 부임하는 그 순간 이미 삼성과의 관계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분관계 때문에 삼성의 눈치를 볼 상황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jtbc의 보도국에서 삼성 이야기는 크게 거리낄 것이 없었다. 홍석현 회장에게 있어서 jtbc는 중앙일보와는 다르다. 대중적인 파급력은 방송인 jtbc가 더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jtbc의 자유로운 보도와 보수적인 정치색 탈피는 채널A나 TV조선과의 차별점이었다. 애당초 중앙일보에서도 홍석현 회장은 '탈 조중동'을 기치로 내세웠다. 이런 것을 봤을 때 'jtbc = 삼성방송'이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탈피하는 것도 새로운 방송사업을 추진하는 홍 회장에게 하나의 과제였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삼성코닝 지분매각 역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손석희에게 '삼성'이란, 그저 자본력이 강한 기업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중앙의 핸디캡 하나를 제거했을 뿐이니 다른 언론들과 같은 딜레마(심지어 한겨레/경향도 빠지는)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석희가 이끄는 jtbc의 삼성관련 보도는 그 의의가 퇴색되지 않는다.
- 하지만, 보광그룹은 어떨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은 남는다. 과연 'jtbc의 직접적인 돈줄에서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나의 의문점을 키운 사건이 바로 중앙일보의 을지로위원회 관련 보도였다. 중앙일보는 을지로위원회를 강하게 건드렸다. 조금 의아한 부분은 을지로위원회는 '갑을관계’, 즉 프랜차이즈와 영세자영업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나선 민주당 내의 작은 모임이었다. 여기에 유력한 정치인이 포함된 것도 아니었다. 활동 내용도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인들의 홍보도 썩 그렇게 훌륭한 수준이 아니어서 남양유업 사태 이후로 그닥 주목받지 않던 분야였다. 단순히 재벌이나 삼성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을지로위원회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중앙일보는 했다. 대체 왜?
우리는 여기서 중앙미디어그룹의 자금줄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홍석현 회장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보광그룹 말이다. 보광그룹은 상당히 많은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광그룹의 주력 사업은 바로 BGF리테일이 담당하고 있다. BGF리테일의 브랜드는 바로 편의점 CU다. 이제 좀 감이 오는가? 편의점 사업이야말로 갑을관계, 프랜차이즈 본사와 영세자영업자간 관계의 정점에 있는 사업이다. 매체비평지들은 중앙의 을지로위원회 관련보도를 두고 삼성이나 재벌에 연관점을 뒀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중앙 = 삼성'이라는 등식에 근거했다. 당연히 중앙은 삼성과의 관계를 부인할 여지가 있다. 이미 자본관계에서 두 기업은 엄연히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보광그룹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역시 을지로위원회를 언급한 그 보도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 또한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을지로위원회의 '갑을관계’ 정상화, '일감 몰아주기’ 등 경제민주화 화두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보광그룹이며, 보광그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미디어그룹이 바로 중앙미디어그룹이라는 사실이다.
- 손석희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은 정말 없는가
삼성보다 더 직접적이다. 손석희 사장을 영입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바로 홍석현 회장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과연 이 '경제민주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짚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연 편의점업계의 문제가 대두됐을 때 jtbc가 CU와 BGF리테일을 적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지, 아니 보도라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손석희라는 개인을 믿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 구조 자체를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없다. 아니 그런 시도를 한다면 손석희 사장 역시 '월급쟁이’ 사장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 쫓아낼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jtbc의 구성원 자체도 중앙일보에서 수혈한 인력이 많기 때문에 '내부의 문제제기'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전 시사저널 기자들(현 시사in 기자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액션'을 취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일전에 나는 손석희 사장의 종편행을 비난하는 일부 언론인들을 비판하면서 '손석희가 살아온 궤적을 보고 기대를 하고,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 그를 비판하라'는 요지의 글을 쓴 바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jtbc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낼 수는 없다. 물론 이 불안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손석희라는 브랜드가치가 아직은 크기 때문이다. 애써 자유로운 '방송'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놓은 jtbc를 굳이 '재벌 방송'이라는 이미지로 떨어뜨린다면 그동안 쌓아온 '방송사업체'로서의 jtbc는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삼성에서 보광으로 바뀔 뿐, jtbc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말의 의구심(재벌 방송)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jtbc의 이미지가 잘 구축된 이후가 우려된다. 꽤 많은 예비스타 기자들을 내놓은 jtbc의 이미지가 완성되는 순간 jtbc가 아무리 보광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송으로 바뀌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인지할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손석희가 보광과 공생관계가 되든 적대관계가 되어 내쳐지든,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대로 손석희가 보광과의 공생관계를 구축해 '궤적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 해야 할 비판'을 하는 것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긴장감만은 계속 간직하면서 jtbc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jtbc는 그것대로 아끼면서 말이다.




홍석현의 리셋 코리아와 여시재






 
촛불민심 담을 용광로
오늘 일자리서 미래 4차 산업혁명까지 ‘리셋 코리아’
http://news.joins.com/article/21126897 (참여인사 명단 재중)
홍석현 회장 “디지털 민주주의로 새 국가 만들자”
http://media.daum.net/v/20170113203141749
홍석현 “디지털 민주주의 통해 새 국가 시스템 만들자”
http://media.daum.net/v/20170114124252791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분과위원에
‘여시재’ 이사장 이헌재, 부원장 이광재, 이사 김현종 참여.
회고록 송민순, 국회의장 정의화(새누리당 친이계) 참여.
재벌 저격수 한성대 김상조 교수,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참여.
<여시재, 홍석현의 대선 싱크탱크 될까, 단순한 연구기관일까> 2016년 11월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11100025
* 주) 차기 정권 혹은 이후로도 지속 가능한 기득권을 위한 프로젝트. 기득권을 지렛대 삼아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영속적으로 사유화하려는 시도. 홍석현 될 수 있을 것 같으면 홍석현을, 안희정이 유리하다면 안희정을.
* 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빨갱이 사냥하던 홍진기 아들, 삼성 공화국 만든 이건희 처남, 박근혜 최순실에 뇌물 주고 국민연금 동원한 이재용 외삼촌 홍석현이 촛불 민심을 입에 담고 새 시대 선도 운운하는 희비극.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강대인 대안문화아카데미 원장
고은 시인 · 세계한민족작가연합회장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김진명 작가
김춘석 한국리서치 상무
김태유 서울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노익상 한국리서치 회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백영철 한반도포럼 이사장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성낙인 서울대 총장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송호근 서울대 교수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오종남 새만금위원회 민간위원장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광재 여시재 부원장
이광형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
이헌재 여시재 이사장
이희옥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장
장덕진 서울대 교수
전순옥 더불어민주당 소상공인특별위원장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정의화 새한국의비전이사장(전 국회의장)
정창영 연세대 명예교수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
한상호 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

리셋코리아 13개 분과 위원

정치분과
위원장 장훈 중앙대 교수
위원 구본상 연세대 교수
김선택 고려대 교수
서정건 경희대 교수
윤석만 변호사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정회옥 명지대 교수
한정훈 서울대 교수
간사 최상연 논설위원
시민정치분과
위원장 김의영 서울대 교수
위원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유석진 서강대 교수
이지문 연세대 교수
이태동 연세대 교수
조희정 이화여대 교수
간사 강찬호 논설위원
국방개혁분과
위원장 정승조 전 합참의장
위원 구본학 한림대학원대학 총장
김병기 전 국방비서관
노훈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손영동 고려대 교수
신원식 전 합참차장
이용대 전 국방부 전력자원실장
홍규덕 숙명여대 교수
간사 김민석 군사안보전문기자
외교안보분과
위원장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 전 주러시아 대사
위원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 전 주일 대사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이희옥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장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전 외교안보수석
간사 김수정 국제선임기자
통일분과
위원장 김병연 서울대 교수
간사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혜영 민주평통 서울 사회복지분과 간사
박영호 강원대 교수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양창석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유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종석 한국건설관리학회 한반도통일 건설산업위원장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
전성 변호사
정태용 연세대 교수
간사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부장
통상분과
위원장 김현종 한국외대 교수
위원 김범수 변호사
김종범 연세대 교수
김흥종 KIEP 선임연구위원
송영관 KDI 연구위원
간사 남정호 논설위원
경제분과
위원장 이종화 고려대 교수
위원 강영재 코이스라시드파트너스(KSP) 공동대표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
김윤이 뉴로어소시에이츠 대표
김진영 고려대 교수
박정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조성욱 서울대 교수
한순구 연세대 교수
홍기석 이화여대 교수
간사 김동호 논설위원
기업지배구조분과
위원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
위원 김우진 서울대 교수
김우찬 고려대 교수
박경서 고려대 교수
이상승 서울대 교수
조명현 고려대 교수
간사 나현철 논설위원
교육분과
위원장 이주호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위원 김경근 고려대 교수
김이경 중앙대 교수
김태완 미래교육연구원 원장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마동훈 고려대 교수
박주형 경인교대 교수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소장
이화성 창덕여중 교장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
주석훈 미림여고 교장
간사 양영유 논설위원
강홍준 사회선임기자
보건복지분과
위원장 송인한 연세대 교수
위원 권용진 서울대 의대 겸임 교수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
양재진 연세대 교수
오건호 ‘내가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정혜주 고려대 교수
조상미 이화여대 교수
조영태 서울대 교수
진미정 서울대 교수
하정화 서울대 교수
간사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노동분과
위원장 주완 김&장 변호사
위원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
권혁 부산대 교수
김영기 전 LG그룹 부사장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박가열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
박지순 고려대 교수
박호환 아주대 교수
안희탁 규슈대 교수
오학수 일본 노동연구연수기구 주임연구위원
이상학 전 민주노총 정책실장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
황용석 롯데그룹 인사노무담당 상무
간사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문화분과
위원장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위원 김대관 경희대 교수
박삼철 서울디자인재단 디자인연구소장
박신의 경희대 교수
성기완 계원예대 교수
손철주 미술평론가
신용언 배재대 초빙교수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안호상 국립중앙극장장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
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
간사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논설위원
4차산업혁명
위원장 김태유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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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의 리셋 코리아와 여시재>
https://medium.com/@enkm/e8fd1476548c


(끌올) 친일파 홍진기

-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 그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생활

- 경향신문 폐간

- 이승만 정권 법무부 차관, 장관, 내무부 장관 역임

- 3.15 부정선거를 뒷수습함

- 부정선거에 불만을 가지는 자는 빨갱이로 몰아 처형

- 4.19 혁명당시 시민에게 발포명령 수백명의 사상자 발생

- 항일 운동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간첨혐의로 몰아 처형

- 4.19 혁명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삼성 이병철 회장의 로비로 광복절 특사로 풀려남

- 이후 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중앙일보사 회장

- 2008년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됨





자녀들

- 홍라희 ,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내

- 홍석현 , 중앙일보및 JTBC 회장

- 홍석조 , 보광페미리마트 회장 (CU편의점)

...



참고1.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은 '신직수'의 딸



참고2. 신직수 - 박정희 시절 검사, 중앙정보부부장, 법무부장관을 지냄, 박정희의 오른팔

-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중 한명

- 중앙정보부 부장시절에 일어난 사건이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장준하 의문사', '최종길 교수 의문사'

- 신직수가 가장 총애하던 검사가 현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참고3. 친일발언 논란있었던 '문창극'은 전 중앙일보 주필

참고4. 신직수의 자손이 물려받은 재산과 인맥으로 '소셜커머스'사업에서 대박을 쳤다는 예기가 있음